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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적인 인간 및 행위

윤석열은 도처에 있다.

장남과 재산 다툼을 벌이던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조시마 장로가 기거하는 수도원을 찾는다.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현인에게 가족 화합의 지혜를 청한다는 구실이었다. 자신을 계몽철학자 디드로에 빗대며 장광설을 펴던 난봉꾼 카라마조프가 돌연 자세를 고쳐 잡아 묻는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조시마 장로가 웃으며 답한다.

“당신은 이미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과한 술을 삼가고, 말씀을 자제할 것이며, 방탕한 길을 걷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자기 거짓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결국엔 어떤 진실도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마음 붙일 곳을 찾아 정욕과 거친 쾌락에 빠져 짐승과 다름없는 죄악에 이르게 됩니다.”

검사 윤석열이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얼마 안 된 시점부터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난봉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모습이 그에게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폭음을 일삼고, 떠벌리기 좋아하며, 도무지 수치심이란 걸 모른다는 뻔한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건 그가 술 마시듯 쏟아내는 거짓말이었다.

“복수로 수사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인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이 말은 건달기 다분한 검찰 간부의 허세 정도로 봐 넘길 만했다. “아내는 주식투자로 손해만 봤다”, “제 장모는 남에게 10원짜리 피해 한번 준 적이 없다”, “이웃집 할머니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써줬다”는 말도 다른 거짓말들에 견주면 사소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명태균에게 여론조사를 의뢰한 적도 없고 보고서도 받아본 적 없다”거나 “채 상병 사건으로 격노한 적도 없고 수사 외압도 가하지 않았다”는 말은 달랐다. 그의 직을 흔들 만큼 중대한 거짓 진술이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쏟아낸 거짓말에도 윤석열의 지위가 굳건했던 건, 그가 뛰어든 ‘정치라는 장’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정치에서 거짓말은 원하는 바를 폭력 없이 성취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덜 유해한 수단 정도로 여겨져온 탓이다. 진실이 정치의 주요 덕목으로 인정된 기간 역시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도 매우 짧다.

실제로 정치에선 진실(사실)과 거짓말(허위)의 경계가 빈번하게 무너져 내렸다. 정치가 부단히 변화하는 인간사의 영역에 속한 만큼, 거기서 생겨나는 사실이나 사건들이 모두에게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사실이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사실이 되는 일이 정치 영역에선 다반사였다.

따라서 이 세계에선 아무리 자명해 보이는 사실도 허위의 공격 앞에 취약하다. 홉스의 말처럼 “그 누구의 이득이나 쾌락을 거스르지 않는 진실”만이 “모든 이에게 환영”받기 때문이다(‘리바이어던’). 사실의 견고함을 깨뜨리고 싶다면 그것을 ‘의견의 세계’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2024년 12월3일 밤의 비상계엄도 마찬가지다. ‘군을 동원한 국회 장악 시도’라는 확고부동한 사실의 진술조차 그날에 관한 여러 ‘의견들’ 중 하나로 유통되고 있음을 40여일이 지난 오늘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선 ‘12·3 내란’에 대한 엄격한 사실 진술도 그것이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고도의 통치행위’였다는 거짓말과의 경합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내란 뒤 윤석열이 쏟아낸 다양한 거짓말들, 요컨대 ‘12·3 비상계엄 때 국회에는 무장하지 않은 소수 간부 병력만 투입했고, 계엄 해제 의결이 있으면 즉시 국회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려고 처음부터 계획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내란이 아니라 국회에 대한 경고가 목적이었던 정당한 통치권의 행사였다’는 말들 역시 미치광이 술꾼의 ‘궤변’과 ‘망상’ 정도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중요한 건 이 말들이 윤석열 자신과 극우 유튜버와 한남동에 몰려든 관저 시위대뿐 아니라, 국민의힘 당원과 국회의원들, 그들에 우호적인 대중의 의식 속에 견고한 사실(‘대안적 진실’)로 자리 잡아간다는 데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농성하던 윤석열을 끌어내 법의 심판대에 세운들 내란의 청산과 극복은 요원해진다. 어쩌면 우린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보다 ‘사실적 진실’을 지켜내는 일에 더 많은 땀과 피를 쏟아야 할지 모른다.

윤석열은 도처에 있다. 내일의 그는 난봉꾼 카라마조프의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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