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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를 본관 문경공파(文景公派): 이극감(李克堪)은 이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이며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

준경(浚慶)ㆍ자 원길ㆍ호 동고

연산5년 1499년에 탄생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온 문중이 화를 당했으며 당시 공의 나이는 6세였다. 형과 같이 충북 괴산 청산으로 귀양갔다가 1506년 중종이 반정하자 비로서 서울에 돌아왔고 외조부에게 가서 자랐다. 모친 평상 신씨는 평산의 대성이다. 고려태사 신숭겸의 후손이고 판관 승연의 따님이다. 상서공이 공의 기국을 기이하게 여겨서 공의 대부인에게 부탁하기를「이 아이들은 먼 장래에 대기가 될 재목이니 조심해서 보호하라」하였다. 종형 탄수선생께 배웠고 나이 17,18살에 덕행이 성취하였다. 학궁의 과거공부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에 힘썼고 예법으로써 몸을 지켰다. 임오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다만 학업이 저명하였을 뿐 아니라 덕망이 벌써 많은 선비의 추앙하는바 되어 사람들이 그가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줄을 알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대부인을 섬기는데 화한 안색을 즐겁게 하였고 매양 대부인이 병환이 있으면 몸소 약을 다리며 드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맛보았다.
신묘에 과거에 올라 승문원에 벼슬을 했다가 곧 사관으로 보임되었고 임진에는 옥당에 들어가서 정자가 되었다. 사인 이종익이 소장을 올려서 시사를 공박하고 김종직의 학문을 말하였는데 집정자가 크게 노해서 국문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이품 및 삼사를 소대시켜서 논의하니 모두 죽음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이 소관으로써 말하길「이 사람의 논의가 괴벽하니 진실로 죄줄만 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소를 올린 것으로 죄를 당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듯 합니다.」하였는데 김안로와 허황이 몹시 미워하여 파직 당했다. 계사에 재차 주서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저작, 박사로 옮겼고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야대에 나아가서 구수담과 함께 계하기를「안처겸의 옥사에 실정도 없이 귀양간 자가 많으니 석방하여서 천변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그때에 기묘옥사에 관련되었던 사람을 한창 배척하면서 공은 이연경의 종제이고 수업하였더라는 것을 지적하여 죄를 만들어서 파직되었다.
안로가 공에게 함혐하기를 머지않아서 빠른 시일 안에 또 화를 당할 듯 하였다. 공은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며 날마다 일정한 과정이 있었는데 문장을 일삼지 않고 성리학에 힘썼다. 입으론 절대로 시사를 말하지 않고 발이 문밖에 나서지 않은지가 무릇 다섯해였다.
정유에 세 간신이 베어 죽임을 당하자 곧 서용되어 호조좌랑으로 제수되고 천거되어 이조에 들어갔다가 문학, 필선, 교리, 장령, 군기시첨정, 부응교, 보덕으로 옮겼고 아울러 지제교를 겸하였다.

중종께서 세자의 악문이 나날이 진보하므로 궁료를 널리 선택하는데 공이 경학에 넉넉하고 강의를 잘하는 줄 알고 뽑아서 서강원에 가장 오래도록 두었다. 그때에 인종이 동궁에 있으면서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이르고 고이 오래도록 연석에 모시었으므로 경학이 있음을 알고 날마다 세 번씩 접견하는 예와 고문하는 총애가 딴 궁료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글을 읽다가 의심이 있으면 비록 밤이라도 때 없이 소대하여 문득 자문하니 그 알아줌이 보통에서 뛰어났다. 공도 또한 스스로 군신간에 지기라 하였는데 신민에 복이 없어 궁검만 남아 있게 되었다.
신축에 직제학으로 승전되었고 오래지않아서 본직으로 부재학에 발탁되었다. 그 때에 소인의 환란이 다시 싹트고 온 조정이 입을 다무는 것이 버릇으로 되었으며 천번이 두렵고 좋아함과 미워함이 공변되지 못함을 극단적으로 논난하였다.
계묘년에 문신 정시에 공이 첫째로 뽑혀 계자로 진급하였다. 우윤, 대사성으로 진급하니 공은 여러 유생들에게 훈계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글을 읽어서 몸을 닦을 뿐이다. 학궁이 어찌 시사를 논하는 곳이냐」하니 모든 유생들이 공을 신뢰하고 존앙하였다.
갑진년 중종이 승하하여 공이 사신으로 명을 다녀온 후 형조참판으로 제배되었다. 인종 초년에 공이 조정에 말하기를 「태제를 일찍 봉해서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그때 공의 말대로 하였더라면 을사 기유년과 같이 화변이 있었겠는가? 공이 앞날을 내다봄이 그때를 당하여 모든 사람이 탄복했다. 여러 재상들이 윤원로를 죽이기를 의논했으나 박소일을 들어 이일을 중지시키었다.
을사에 이기와 임백령이 공을 꺼리어 외방으로 내치니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 다스리기를 간략 엄정히하여 속관을 물리치고 올림이 공정하고 명백하니 온 백성이 공을 심복하여 따랐다. 무신년에 병조판서로 승차되어 여러번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벼슬이 갈려서 대사헌에 제수 되었다가 추부에 이임되었다. 경술년 5월에 이기와 진복창이 없는 일을 교묘하게 꾸미어 공을 보은현에 귀양보내었다. 조야가 다 놀라고 의정 심연원이 탄식하기를「이 사람이 높은 명망으로 이런 환난을 당한다.」하였다. 이기의 앞잡이 이무강이 앞장서서「이준경은 문무를 겸비해서 국가에 이롭지 못하다.」하여서 반드시 죄를 더하자 하였는데 권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리니 이무강은 꾀를 더하지 못하였다.
신해년에 사면되어 북쪽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지중추 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맡고 임자년 형조판서에 기용되었다. 이 당시 서북면에 장수 김수문이 강건너 변경에다 진을 설치하고져 하였는데 오랑캐가 원망하여 장차 난을 일으키고져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사전에 예방하고져 조정에서는 공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하여 공을 천거하니 현지에 이르러 잘 살펴보고는 「큰일 날뻔 했다 거의 일을 그르칠 뻔했다.」하고는 진을 고치고 각지를 순방하면서 초무하여 위엄과 신의를 보이니 오랑캐의 정세가 곧 안정되었다. 돌아와 복명하니 대사헌에 제수되니 무릇 네 번이나 풍헌의장이 되었다.

겨울에 임금이 청백한 신하를 가려 잔치토록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공이었으나 공은 병을 핑계하고 참석하지 않으니 이 선택을 당한 것이 스스로 두렵게 여긴 까닭이었다. 갑인에 이조판서로 제수되니 공은 선임이나 승진시키는 데는 모두 당시의 공의와 공론에 따라 시행하니 당시 선조의 부친되는 덕흥대원군(덕흥대원군 부인은 공의 이성재종매)이 와서 관직재배에 대하여 요청하였으나 공은 「왕자가 사대부의 집에 다니며 인사를 청하는 것은 옳은 일이 결코 아니다.」하니 대원군은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을묘에 공조판서를 맡았다 형조로 이임되었으나 법을 적용함에 경중에 따라 인명의 생사가 달렸으니 공에게는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사퇴하였다.
을묘 5월에 왜적이 호남에 침입하여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이니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좌우방어사를 갈라서 보내고 공을 도순찰사로 삼었다. 오랫동안 전쟁을 모르고 평화에만 잠겨있던 백성들은 갈팡질팡하여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피난하고 공은 형인 이윤경 전주부윤을 순변사로 추천하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영암성에서 왜적을 맞아 갈팡질팡하여 싸움한 번 제대로 못하고 피난하니 공은 형인 이윤경 전주부윤을 순변사로 추천하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영암성에서 왜적을 맞아 독전하도록 하니 모든 곳의 성주들은 다 피신하였으나 윤경공 홀로 영암에서 왜적을 격퇴시키었다. 그 후 왕은 남정한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우찬성을 제수하고 병조판서를 겸직토록 하였다.
세 번이나 병권을 맡아서 장재를 가려 뽑고 병졸을 훈련시켰다. 공은 군율을 엄히 집행하고 병사를 친자식 돌보듯 하니 군정이 거양되었다. 당시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남치근등은 모두 공이 발탁한 사람이었다.
임금은 공을 세자를 보양하는 동궁관으로 특별히 제수하니 공은 사퇴하기를「신은 온화한 기색이 적고 훈도하는 방법도 모자라니 감히 원량을 가까이 모시어서 성취하도록 유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못합니다.」왕은 윤허하지 않으면서 종묘때에 인종을 보양하는 것 같아 하면 된다 하였다.
무오에 좌찬성으로 되었다 곧 우의정이 되니 사인 기대승은「조정의 표준이며 백관의 우두머리를 얻었다.」하며 기뻐하니 조정이 경사로 여겼다. 경신년에 좌의정에 승차되고 세자태부의 벼슬을 더 하였다. 공이 이미 정승자리에 올라서는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니 백관이 두려워 하였다.
위로 계옥하기를 다하여 날마다 바로 잡기를 일삼고 아래로 강령을 제시하여서 모든 일을 도왔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은 선조때에 정암 조광조선생이 힘껏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와서 공이 윤허를 받으니 여론이 어렵게 되었다.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어찰로 붙잡았고 계미년 각질로 사직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장을 올려 왕이 외숙인 윤원형의 죄를 물어 사정을 끊고 정형하도록 청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하여서 사흘만에 윤허한 것은 공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원형이 시행한 나쁜 정사와 폐단을 많이 고치도록 청하니 모두 채납되어 시행하였다. 이 때 심통원 또한 정승으로 있었는데 척당의 번성함을 믿고 궁액의 권세를 펴서 이량을 쫓아내고 스스로 자신의 공이라 말하니 공이 매우 더럽게 여기고 그가 세력을 믿고 꺼림 없음을 미워하여 비록 같은 반열이지만 서로 대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명종이 편찮을 때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후사에 대한 말은 발설하므로 공이 정색하여서 꺽기를 「이것은 남의 신하로서 감히 논의 할 일이 아니다.」하였다. 병인년 천재로 인해 봉사를 올렸다. 임금이 재앙을 부르는 근본을 논하고 당시에 구차스럽게 합치는 것을 중화라고 분변하였다. 붕당을 배격하여야 태화를 이룰 수 있고 바로도와서 현체하여야 임금의 덕을 닦을 수 있었으며 바른 말을 용납하여야 선비의 기풍이 신장될 수 있다 하고 끝으로는 세자를 국본으로 미리 정하는 것이 재앙을 그치게하는 첫째라 하였다. 아울러 지극한 논의이며 큰 계획을 확정하니 종사가 힘입어서 현하게 되었으니 공이 임금을 섬김과 임금이 공을 알아줌이 지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을축년 영의정이 된 이후로 왕의 총애가 깊어 정묘년 봄에 사직하고져 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6월에 명종이 몹시 위독하여지자 밤중에 공을 불렀다. 공은 임금의 병환이 심하여 질 때부터 평상 도당에 유숙하면서 관대를 풀지 않고 촛불을 밝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을 받자 급하게 입궐한즉 왕은 공을 어상에 오르도록 하고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니 공도 또한 울면서 「저사를 정하지 못했는데 상감의 환후가 이와 같으니 속히 큰 계획을 세우십시오.」임금은 벌써 말을 못하고 안쪽을 향한 평풍을 두드릴 뿐이었다. 공의 뜻을 내전에 품하라는 말인줄알고 급히 서계할 시간이 없어서 바로 말로써 중전에 아뢰길 「상감의 환후가 이에 이르러 벌써 가망이 없습니다. 뒷일을 미리 정한 곳이 있으면 내전께서 반드시 함께 들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까닭에 지금 주상께서 안 쪽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계하였더니 중전은 평풍안에 있으며 말하길「을축년 크게 위독할 때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정하였다.」하니 공은 딴 대신과 삼사장관을 명소하여 이 전교를 함께 듣도록 청하고 사관을 시켜 「덕흥대원군 셋째 아들이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가하다.」라는 12자를 크게 써서 옥궤앞에 꿇어앉아서 「상감의 뜻에 따라 내전에 품한즉 내전의 교지가 이와 같으므로 감히 품합니다.」한즉 왕은 눈물을 머금고 머리만 끄덕일 뿐 하교는 없다가 인해서 승하하였다.
공이 곧 시위한 신하를 시켜 신하에게 세자의 의장을 갖추도록 하여 선조왕을 잠저에서 맞이하고 익실에서 상주 노릇을 하도록 하였다. 종사가 이에 안정을 되찾아 세자를 미리 정해둔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 있어 어가를 따랐는데 이름을 연서하여 두루 머리를 만들어 그때 한일을 기록하여 공을 책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은 소리 높여 불태우기를 재촉하였다.「어진 일은 대내에서 정한 것인데 신하가 어찌 그 사이에 간여하여서 감히 이런 말을 내는가」하니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조가 처음 즉위한 다음 공이 등대하여「마땅히 위로 종사의 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백성의 의탁함을 생각하시어 무릇 시행하는데에 하나라도 마음 놓지 않으셔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왕께서 즉위하는 날을 당해서 먼저 이것을 경계로 삼아 종사를 보존하고 이것을 첫째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바른말 하는 자를 가까이 하고 운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신을 가까이 하고 성심으로 강학하시어 먼저 근원되는 것을 바르게 한 연후 일을 처결하시고 다스림을 하는 근원이 될 것입니다. 운…운…」하고 아뢰니 왕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답이 있었는데 매우 삼가고 꺼려하는 빛이 있었다.
가을에 차자를 올려서 을사년에 귀양간 사람 노수신, 백인걸, 유희춘, 김난상등 10여인을 소환 새정사를 돕도록 하였다. 을사년과 정미년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그 관직을 회복해주고 연좌된자를 방면하여 적몰된 재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공이 나이로써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 받았다.
조광조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몽주의 후손을 녹용하기를 청하여 광은 이에 따랐다.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200여년이 지난 후 공이 태사 허국과 위시량에 청하여 이일을 고치니 사람들은 이일이 공의 힘이라 했다. 또한 김굉필,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대궐에 나가서 예닐곱번이나 간곡하게 아뢰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여름에 가믈으메 늘 공궤와 부비를 줄이고 정미년 기유년 옥사를 신설하여 이기와 정언각의 관직을 사탈하도록하고 또 천재로 인해 포흠된 전곡을 경감하고 침체된 인사를 진작시키며 변방 경비를 단속시키고 옥송을 공평하게 다스리는 일을 네 가지로 조목지어서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간결하고 지당하니 임금이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정공도감을 세워서 대납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청하여서 또한 윤허를 받았다.
선조 3년 영중추부사로 이직하고 영경을 겸하도록 하였다. 몸이 한가하게 되자 독서로 낙을 삼고 지낸지 삼년 후 여름 늦게 병들어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유자를 올리니 첫째로 제왕의 힘씀은 오직 배움의 큰 것이니 정자의 말에 함양에는 오로지 경을 쓰고 진학에는 치지에 있다 하였으니 전하의 배움이 치지의 공에는 반이 지났으나 그 함양공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한고로 말씀하는 기상의 자못 과격을 발하여 아랫사람을 접견할 때 윤윤함이 적으니 엎드려 원하오니 공부를 더하소서. 둘째로 아랫사람을 대접함에 위의가 있음이니 신이 듣건데 천자는 목욕하고 제후는 황황하다하였으니 위의의 즈음에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가 말을 할 때는 마땅히 넉넉한 모양과 예문 있는 얼굴로 비록 때로는 영걸한 기상을 드러내어 진발하고 경계할 것이나 일마다 드러내어 스스로 높이어 성현인 체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한즉 문무백관이 체재가 해이하여 과실을 구원함이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로 군자와 소인을 분별함이니 신이 듣건데 군자와 소인이 스스로 정한 분정이 있어서 가희 덮을 수 없다하였으니 당의 문종과 송의 인종이 일찍이 군자와 소인을 알지못하고 사당에 끌려 능이 분별하여 쓰지 못하다가 드디어 옳고 그름에 현혹하여 조정이 편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군자라면 비록 소인이라 할지라도 직임을 분장하여 발탁해 쓰기를 두 가지 마음으로 하지 말 것이며 진실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사로운 뜻이 있어도 물려 버림을 의심하지 말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조정의 정치에 어려움이 생기리오. 넷째로 붕당의 사사로움을 깨는 일이니 신이 보건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몸이 과실에 들것이 없고 일이 법칙을 어김이 없는데 말의 한가지만 합하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니 높은 의논과 큰 언사로 당을 맺는 것을 높은 격치로 삼아 드디어 허위 풍속을 이루니 이것이 전하가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관찰하여 힘써 이 폐막을 버릴 때요 그러하지 못하면 마침내 국가가 반드시 구원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부인네들을 물리치고 정침으로 옮겨서 동수하도록 명한 다음 곧 운면하니 1572년 향년 74세였다.
차자가 왕께 들어가자 임금이 애도하고 제수를 내리고 3일간 조회를 파하고 군신을 보내어 조문하며 관에서 상사를 비호하는 것을 예대로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선조께서는 청백리로 선발하고 시로는 충정이라 내리고 1610년 퇴계 이황 선생과 같이 선조대왕 문묘에 배향되었다. 인종 정해 1647년 사림들의 영립으로 구계서원을 설립하고 제향하였다. 유고 십권이 전해져 온다. 배위로 정경부인 풍산 김씨이며 참판 양진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서면 소용리에 합장이시다.

 

** 동고선생의 일화 속리산 산신이야기

 

속리산은 조선조 명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자 도인이었던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 선생이 산신으로 주재하고 있다.

속리산속에서의 공부는 정도를 걷는 수련학인들은 잘 봐준다. 다시 말하면 무당같이 소소한 잔술(小術)을 부리는 공부는 동고 산신이 매우 엄격히 통제하므로 공부하기 힘들고 꼼짝을 못하고 단절된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여기에서 공부한 무당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속리산 계곡이 다른 산보다 암반이 좋고 넓직 넓직해서 기도공부를 하기에 아주 좋은 입지조건이다. 그곳에서 이준경 선생은 생시에 이미 정신계 중단은 도달한 도인이다.

동고 선생은 자신의 사심을 버리고 평소 매일같이 겨울에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것이 바로 제갈공명이 쓰던 백우선 같은 것으로 정신수련의 경지가 깊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속리산속에서는 잡신을 믿거나 부리는 자는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산신은 세상을 등지고 진성하게 수련을 하는 자는 잘 봐주고 다시 세상에 나와서 출세하려는 야망이 있는 잔술수련학인들은 안 봐준다고 한다.

잔술을 가지고 억지로 무당을 하려다가는 동고산신에게 혼줄이나서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홀연히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동고 이준경 대감이 죽은 후 용으로 변신하려는 기간이 만 2년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하루 못 채우고 실패했더라고 하는 들려지는 고사(故事)도 있다. 이런 연고로 지금도 속리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좀 심술을 부린다고 한다. 이런 측면이 아직도 무당들이나 좌도(左道)의 소술(小術)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관향
시조
이자성 (李自成)
중시조
이당 (李唐)
집성촌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만선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매원민속마을)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양곡리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당목동
인구
181,377명(2015년) | 국내 53위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며 중시조는 고려 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이당(李唐)이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석탄공파(石灘公派), 암탄공파, 율정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참고로, 광주 이씨의 광주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이고, 광주광역시를 본으로 하는 이씨는 광산 이씨(光山 李氏)다.

2. 역사[편집]

2.1. 조선 이전[편집]

광주이씨족보에 보면 그 조상들이 남북국시대 신라의 칠원성(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1]을 근거지로 삼았던 호족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였으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친히 성을 함락시킨 뒤 칠원성에서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2] 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의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당(唐)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있고 덕망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의 후손들이다.

이당의 다섯 아들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3]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4]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2.2. 조선 시대[편집]

조선 시대 때는 몰락과 중흥을 반복하다시피 했다. 조선 초기때만 하더라도 이극돈, 이극균, 이장손 등으로 대표되며 가장 잘나가는 명문가 중 하나였는데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가문의 융성함으론 광주 이씨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5]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왕이 집안의 기운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예종이 이인손의 묘를 이장시키고 세종대왕의 묘로 삼는다던가,[6] 성종이 아들을 낳을 때 이극배의 집에서 낳게 한다던가 할 정도였다.[7] 이극배는 연산군 초기에 영의정으로서 섭정승을 맡기도 했다. 19살된 연산군이 하도 똑부러져서(?!) 3개월만 맡고 내려왔다고.[8] 그러나 이극균이 왕의 횡음을 바로잡으려고 쓴소리를 하다가 그 조카인 이세좌와 함께 갑자사화 때 처형됨으로써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세좌의 죄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죄 아닌 죄.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며 그야말로 싹 다 쓸려나갔다. 그 후 이준경[9], 이덕형 대에 들어 다시 부활했지만 광해군 대의 권신 이이첨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다시 한번 쓸려나갔다.(...) 이이첨 이후에는 큰 몰락도 중흥도 없이 그냥 무난하고 조용하게 지낸 듯. 현종대엔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도빈[10]을 배출하기도 하였으며 그 아들인 우항 역시 경종대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다만 이우항은 신임사화 때 무고하게 죽었다. 숙종 대엔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원정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광주이씨 칠곡파 매원마을은 영남에서 손꼽히는 남인 양반 집성촌이었다.[11] 그 아들인 이담명은 사노친곡십이장이란 시조로 유명한데 이는 갑술옥사로 아버지와 함께 유배 당했을 때 쓴 것. 영정조대의 인물로는 영조대의 청백리 이하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의관을 부르거나 왕세손과 만나게 해주는 등의 일을 한 이광현, 정조대의 실학자 이기양 등이 있다.
아무튼 대구경북 쪽에도 꽤 있다.[12]

조선 시대 광주이씨는 문묘 종사 대현은 배출하지 못했지만 종묘 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이밖에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등도 나왔다. 총 문과 급제자는 188명에 달했으며[13], 유명한 장군이 없어서 그렇지... 무과 급제자 또한 124명이 있다.[14] 생원진사시, 역과, 음양과, 율과, 의과 등까지 모두 합쳐 총 71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의 유명인물은 많지 않은데, 을사늑약 후 활약했던 의병장 이백래, 이동하,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항쟁을 하던 이수택이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훈이 있다. 석공예가 이순석[15] 등도 있다.

3. 분파[편집]

  • 이자성을 비조로 이익비가 중시조인 분파
    • 율정공파(栗亭公派): 파조 율정 이관의(李寬義)는 이당의 형 이한(李漢)의 현손으로, 광주 이씨 4세이다.
  • 이자성을 비조로 이익비가 중시조 이당이 중흥시조인 분파
    • 십운과공파(十韻科公派): 파조 이자령(李自齡)
  • 이자성을 비조로 이익강이 중시조인 분파
    • 석탄공파(石灘公派): 파조 석탄 이양중(李養中)은 이당의 종증조부 이익강(李益康)의 5대손(내손)이다.
    • 암탄공파(巖灘公派): 파조 암탄 이양몽(李養蒙)은 이양중의 동생이다.
  • 이집을 1세로 계대하는 분파: 이집을 1세로 계대한다.
    • 사인공파(舍人公派): 이장손(李長孫)은 이집의 손자이며 탄천 이지직(李之直)의 맏아들이다.
    •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 이극배
    • 문경공파(文景公派): 이극감(李克堪)은 이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이며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 연산군 재위 시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건내어 갑자사화에 사사된 이세좌의 아버지이며 선조때 동인과 서인의 붕당을 예고한 동고(東皐) 이준경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 광천부원군파(廣川府院君派) 이극증
    • 광원군파(廣原君派) 이극돈
    •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 이극균
    • 참판공파(參判公派) 이극기
    •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이극견
    • 문숙공파(文肅公派) 이지강
    • 목사공파(牧使公派) 이지유

4. 특이사항[편집]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는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있는데 그 이유는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은 둔촌 이집(李集)이 연로하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최원도(崔元道)의 집을 찾아갔으나 어렵게 찾아간 친구의 집에서는 반갑게 맞아주기는 커녕 매몰차게 대하며 역적이 앉은 자리라며 부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불태워버리라 지시했다.

이집은 "이 친구가 이럴 친구가 아닌데 분명 다른 생각이 있겠지" 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질때를 기다리니 마침내 최원도가 이집과 그의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다락방에 숨겨준다. 몇년 후 둔촌선생의 아버지 이당이 사망하자 자신이 입을 수의를 내어주고 어머니 묘 근처에 매장하였다.

여기서 천곡 최원도의 집에는 제비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음식을 많이 드시는 주인어른이 아닌데 어느날부터 많은 양의 음식을 내오라 하였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제비가 문틈 사이로 방을 엿보니 주인어른과 낯선 남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고 최원도의 부인에게 말하게 된다. 이 일을 심상치 않게 생각한 부인은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고 여종은 주인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제사지내는 날에는 여종 제비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고 한다. 제비의 무덤은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석에는 연아총(燕娥塚)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대 묘역은 현재 영천최씨에서 광주이씨로 소유가 바뀌어 있다고 한다.

멸족에 가까운 풍파를 겪었음에도 가문 자체는 명문가로 유명했든지 본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든 과거에는 광주 이씨라는 이유만으로 그 셋째 딸을 주곤 했다고.[16] 아직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일례로 광주 이씨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심지어 친일파가 없는 것까지도 자랑으로 삼을 정도.

5. 인물[17][편집]

신분 직위를 넘어 공평하게 나열, 특정인물 강조표기를 금합니다.
  • 이당: 광주이씨 대종의 시조.
  • 이집: 고려 말의 학자. 호는 둔촌. 현재 광주이씨 후손들의 대다수는 둔촌 이집의 직계후손들이다.
  • 이지직: 둔촌 이집의 첫째 아들. 포은 정몽주의 문인. 호는 탄천
  • 이지강: 조선 전기 문신. 문숙공. 둔촌 이집의 둘째 아들. 호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참찬 역임
  • 이장손: 조선 전기 문신. 사인공. 탄천 이지직의 첫째 아들.
  • 이인손: 조선 전기 문신. 충희공. 탄천 이지직의 둘째 아들. 우의정.
  • 이예손: 조선 전기 문신. 관찰사공. 탄천 이지직의 셋째 아들. 황해도관찰사 역임.
  • 이극배: 조선 전기 문신. 광릉부원군. 영의정
  • 이극기: 조선 전기 문신. 참판공. 이조참판,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역임.
  • 이극감: 조선 전기 문신. 문경공. 형조판서
  • 이극증: 조선 전기 문신. 광천군. 좌참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역임
  • 이극돈: 조선 전기의 문신. 광원군. 좌찬성 역임. 무오사화 항목 참고
  • 이극균: 조선 전기 문신. 좌의정, 연산의 갑자사화시(1504년) 화를 입었다.
  • 이극견: 조선 전기 문신. 좌통례공.
  • 이세좌: 조선 전기의 문신. 이조판서,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역임. 폐비윤씨가 사사될 당시 사약을 전달했다 하여 갑자사화때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 이세준: 조선 전기의 문신, 남원부사, 이극균의 장남, 연산의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 이세건: 조선 전기의 문신, 좌통례, 이극균의 차남, 부 이극균과 형 이세준과 함께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 이연경: 조선 중기 문신. 학자. 사헌부 지평(持平) 등으로 활동하며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문하에 노수신(영의정), 심건, 강유선 등 당대 최고의 문신, 학자를 배출했다.
  • 이윤경: 조선 중기 문신. 호는 숭덕재. 병조판서 역임. 이준경의 형
  • 이준경: 조선 중기 문신. 호는 동고. 영의정 역임. 이윤경의 동생
  • 이광악: 임진왜란 3등공신. 김시민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해 진주성을 승전으로 이끈 장본인. 김시민 장군이 적의 흉탄에 쓰러진 뒤, 흐트러진 병졸을 추스리고 선봉에서 전투를 진두지휘해 마침내 대승을 이끌었다.
  • 이이첨: 조선 광해군대의 권신
  • 이덕형: 임진왜란시의 명 외교가, 호는 한음, 영의정 역임, 오성과 한음의 그 유명한 한음이다. 오성의 이항복과 본관이 다르다.
  • 이윤우: 호는 석담. 공조참의 역임. 칠곡에 세거하고 있던 칠곡 광주이씨 문중을 이후 영남 남인 명문가로 성장하게 하는 데에 반석을 놓았다.
  • 이원정: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귀암. 이조판서, 형조판서 역임. 조선 숙종 대에 남인의 거두였으나, 삼복의 변으로 숙종에게 숙청당하고 국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 이수각: 독립운동가
  • 이윤재: 국어학자
  • 이수목: 독립운동가
  • 이명래: 이명래고약 창시자
  • 이종훈: 독립운동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 이강: 독립운동가
  • 이병식: 독립운동가, 천도교인
  • 이석: 독립운동가
  • 이두석: 독립운동가
  • 이항진: 독립운동가
  • 이달영: 독립운동가
  • 이수일: 독립운동가
  • 이수택: 독립운동가
  • 이태영: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변호사로 유명하며 남편은 정일형 전 외무부 장관, 아들은 정대철 전 의원이다.
  • 이정래: 국회의원
  • 이정재: 자유당 정권시절 정치깡패
  • 이종욱: 전 삼익건설 회장, 수원대학교 설립자
  •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 본인의 호를 딴 '관정 이종환교육재단'을 운영하며 기부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 이중재: 전 국회의원(6선), 광원군파 21대손
  • 이경재: 전 국회의원, 이중재 전 의원의 사촌동생
  •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
  • 이우재(1934): 전 체신부 장관, 전 국회의원, 전 한국전기통신공사(KT) 초대사장
  • 이순재: 배우, 전 국회의원
  • 이휘소: 물리학자
  • 이수성: 전 서울대 총장, 전 국무총리
  • 이경재(1941): 전 국회의원,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위의 이경재와 동명이인
  • 이기재: 전 서울 노원구청장
  • 이수인: 전 국회의원, 교수. 이수성 전 총리의 동생
  • 이용훈(1942): 전 대법원장
  • 이명재: 전 검찰총장
  • 이정재(1946): 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이명재 전 검찰총장의 동생
  • 이도련: 성우, 배우
  • 이종구(배우): 성우, 배우
  • 이택순: 전 경찰청장
  • 이달곤: 국회의원, 전 행정자치부 장관
  • 이종석: 헌법재판소 재판관, 좌통례공파
  • 이주영: 전 국회의원, 전 국회부의장, 전 해양수산부 장관, 문경공파 24대손
  • 이종구: 전 국회의원, 이중재 전 의원의 아들, 광원군파 22대손
  • 이종배: 국회의원, 문경공파 22대손
  • 이용호: 국회의원, 문경공파 20대손
  • 이용근: 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 이해재: 전 경기도지사
  • 이춘희: 세종특별자치시장, 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 이종상: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 이백래: 전 경기도 도의원 문화공보위원장
  • 이용훈: 가톨릭 성직자, 현 천주교 수원교구장
  • 이양재: 애서운동가, 서지학자, 회화사학자, 리준만국평화재단 설립자
  • 이인재: 전 파주시장
  • 이해식: 국회의원, 전 서울 강동구청장. 특이하게도 선조의 고향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 이일재: 배우
  • 이경제: 한의사, 이인재 전 파주시장의 동생
  • 이원석: 현 검찰총장
  •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 이윤정: 가수, 이경재 전 의원의 딸
  • 이승한: 전 홈플러스 회장
  • 이준석: 국민의힘 초대 당대표
  • 이광수: 배우, 23세손 '洙'자 돌림
  • 베이식: 본명 이철주, 힙합 랩퍼
  • 이기광: 하이라이트 소속 가수.
  • 이주연: 더보이즈 소속 가수
  • 이범수: 조선 전기 자전거 타 지역 예선장
  • 이은수: 말레이시아 홍보대사
  • 이장영: 한국금융연수원 원장